역투하고 있는 이나오 가즈히사

지난 4월14일 미 프로야구 LA다저스에서 활약하는 류현진 선수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3타수 3안타를 때려 화제가 됐다. 선발투수로 6이닝 3실점의 호투 속에 타격의 물꼬까지 트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데뷔 2승째. 그야말로 류현진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한 경기였다.

 

1984년 한국프로야구는 최동원 투수(2011년 작고)의 한 해였다. 시즌 27승을 올린 최동원은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거둔 4승을 책임지며 소속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내셔널리그처럼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지 않기 때문에 그의 타격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으나 그해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원맨쇼로 막을 내렸다.

 

일본에서도 타격과 피칭 실력을 겸비한 선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일본 야구팬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는 유명한 선수가 있다. 바로 이나오 가즈히사(稲尾和久:1937~2007)란 투수다.

 

이나오는 '철완'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일본 최고의 우완투수의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신기에 가까운 제구력은 정평이 나있다. 공 한개, 반개가 아닌 몇개로 쪼갤 수 있는, 묘기에 가까운 컨트롤과 엄청난 연투능력은 가히 '괴물' 수준이다.

 

1956년부터 69년까지 퍼시픽리그 니시테쓰 라이온스(西鉄-세이부 라이온스의 전신) 소속으로만 14시즌을 뛴 그는 61년 78경기에 등판해 42승(14패)을 거뒀다.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선발로 30차례 나와 25회 완투를 펼쳤고 완봉승만 7번을 했다. 이나오 덕택에 니시테쓰는 일본시리즈 3연패의 금자탑을 쌓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니시테쓰가 1958년 일본시리즈는 역대 최고의 명승부이자 이나오를 레전드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니시테쓰는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가 4번타자에 포진한 센트럴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그해 일본시리즈에서 만났다. 자이언츠는 나가시마 이외에도 후지타 모토시(藤田元司), 호리우치 쓰네오(堀内恒夫) 등 막강 선발진이 버티고 있는 강팀이었다. 니시테쓰는 전반기 한 때 퍼시픽리그 1위와 11경기나 뒤졌으나 올스타전 이후 이나오가 17승1패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리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 직전 이나오가 갑자기 원인불명의 고열에 시달리면서 승부의 추는 요미우리로 기우는 듯했다. 실제 1차전 선발로 나선 이나오는 1회 나가시마에게 우익선상을 흐르는 3루타를 맞으며 선제점을 내줬다. 나가시마는 7회에도 바뀐 투수 가와무라로부터 2점 홈런을 뽑아냈고 요미우리는 9-2 대승을 거뒀다. 2차전도 호리우치의 호투에 밀려 2-7로 패한 니시테쓰는 3차전마저 0-1로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다. 이나오는 3차전에서 완투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3회 요미우리의 히로오카 다쓰로(広岡達朗)에게 통한의 3루타 한 방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만화같은' 반전드라마가 시작됐다. 비 때문에 하루 순연돼 열린 4차전에 또다시 나온 이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기적의 역전우승을 거둔 뒤 기뻐하는 니시테쓰 선수들. 맨 오른쪽이 이나오 가즈히사.

나오는 6-4 완투승을 거뒀다. 5차전에서는 0-3으로 뒤지던 니시테쓰는 7회 2점, 9회 1점을 만회해 동점을 만든 뒤 연장 10회말 타석에 들어선 이나오가 끝내기 홈런을 때리며 역전극을 연출했다. 이나오는 이 경기에서 3번째로 마운드에 올라와 승리투수가 됐다. 경기 후 구장을 나선 이나오 앞에 한 남성팬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하나님, 부처님, 이나오님(神様、仏様、稲尾様)"이라고 외친 일화는 당시 신문의 제목을 커다랗게 장식했다. 이 제목은 이후 이나오의 대명사가 됐다.

 

이나오는 6, 7차전을 모두 완투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니시테쓰는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일본시리즈 패권을 거머쥐었다.

 

흥미로운 것은 30여년 뒤 '인연의 대결' 2라운드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58년 당시 니시테쓰의 주전 2루수였던 오기 아키라(仰木彬)와 요미우리의 에이스 후지타는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각각 긴테쓰 버펄로스와 요미우리 감독으로 만났다. 결과는 요미우리가 3연패 당한 뒤 4연승으로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후지타 감독으로서는 선수시절 당한 통한의 역전패를 설욕한 셈이 됐다.

 

현역 통산 276승을 거둔 이나오는 대투수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처음부터 그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7년 오이타현 벳푸시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이나오는 어부였던 아버지의 뜻에따라 어려서부터 배를 타야했다. 이나오는 당시에 대해 "얇은 나무판 한 장 밑에는 깊이를 알수 없는 바다였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작은 배에 매일 올라야했지만 그 덕분에 마운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력을 얻게됐다"라고 회상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중심을 지탱하면서 그의 강인한 하체가 길러졌다고도 한다.

 

 

니시테쓰 전성기의 이나오 가즈히사(맨 왼쪽)과 주전 선수들.

고향에 있는 미도리가오카 고교에서 야구를 했던 그는 그 때만해도 일개 무명선수에 불과했다. 고교졸업 후 당시 오사카에 본거지를 둔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진로를 바꿔 니시테쓰에 입단했다. 나카이와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오사카에 가는 것보다도 (니시테쓰의 본거지인) 규슈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게 낫다"는 아버지의 조언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고교 1년 선배 가와무라 히사후미가 니시테쓰 경영진에게 이나오를 적극 추천하는 바람에 1956년 니시테쓰를 선택했다.

 

그러나 입단 초 이나오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니시테쓰 감독인 미하라 오사무(三原脩)는 "(이나오는) 배팅볼 투수를 시키려고 데려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실제 이나오는 입단 후 처음 맞은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니시테쓰의 주력 타선의 배팅볼투수 역할을 했다. 입이 걸기로 유명한 도요다 야스미쓰(豊田泰光-1953년 신인왕으로 고졸 신인 1년차부터 니시테쓰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는 그를 '수동식연습기계'라고 불렀다.

 

이나오는 그때 선배들로부터 연습 공 4개를 던지는 가운데 반드시 1개는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받았다. 가운데로만 던지면 타격 연습이 제대로 안된다는 이유였다. 이나오는 4개의 공 가운데 한 개는 스트라이크존에서 약간 벗어나는 아슬아슬한 구석에 꽂아넣는 연습을 하면서 제구력을 다듬었다. 나중에는 어찌나 잘 던지던지 캠프가 끝나갈 무렵에는 니시테쓰의 내로라하는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오히려 주전 타자들이 "감독님, 이나오 한번 써보시죠"라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데뷔 첫해인 56년 21승을 거둬며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이듬해 35승을 따낸 이후 1963년까지 8시즌 연속 20승 이상을 올렸다. 특히 데뷔 2년차인 57년에는 시즌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현역시절 최다승리투수 4회, 최우수 방어율 5회, 최다 탈삼진 3회 등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2년 7월1일 '이나오 메모리얼데이'를 맞아 세이부 라이온스(니시테쓰의 후신)의 모든 선수들이 이나오의 등번호인 24번을 달고 나와 경기에 임하고 있다.

이나오는 1969년 은퇴 후 니시테쓰(1970~74), 롯데 오리온스(1984~86)에서 8시즌 동안 감독을 맡았으나 통산 431승 545패 64무(승률 0.442)를 기록했다. 선수 때만큼 화려한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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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홍민

현역 시절 외다리 타법으로 공을 기다리는 왕정치

일본 야구 팬들 사이에는 '기로쿠노 오, 기오쿠노 나가시마(記録記憶長嶋)'란 표현이 회자된다. 통산 868개의 홈런,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55개)을 올린 오 사다하루(王貞治-이하 왕정치)와 '미스터 베이스볼'로 불리며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에 대한 평가다. 대다수 일본 야구팬의 아련한 추억에는 나가시마의 인기와 존재감이 훨씬 강렬하게 부각돼 있지만 실력만큼은 왕정치 출중하다는 의미가 이 말에 녹아들어 있다.

 

왕정치는 대만 국적(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이란 핸디캡과 보이지 않는 텃세를 극복하며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상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다. 1979년 외국 국적을 가진 그가 최초로 일본 정부로부터 국민영예상을 받은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세계의 왕'(世界王-그가 868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세계 최고의 홈런타자에 등극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란 별명 역시 왕정치에게 보내는 일본인들의 찬사다.

 

그가 배타적이기로 이름난 일본 야구계에서 긴 생명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실력뿐 아니라 선수로서 성실한 자세와 겸손함 덕택이다. 본인 스스로 '나는 라면집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자신을 한껏 낮추는 등 서민적 이미지를 보임으로써 팬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최고명문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을 지냈고 현재는 소프트뱅크 구단 대표를 맡고 있다.

 

1959년 요미우리에 입단, 22시즌간 뛰며 그가 남긴 성적은 가히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통산 868개 홈런을 때린 그는 1964년 한시즌 최다 55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승엽이 2003년 시즌 56개를 터뜨리며 왕정치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아시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데뷔한 해인 1959년 7개를 친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무려 21시즌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것도 왕정치 뿐이다.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만 15차례다. 홈런 뿐 아니다. 타점(2170타점), 출루율(0.446), 장타율(0.634), 득점(1967점)은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프로야구에서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한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왕정치의 기록에 도전한 타자들(모두 외국인 선수다)에 대해 투수들이 정면 승부하지 않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5년 랜디 바스(한신 타이거스), 2001년 터피 로즈(긴테쓰 버펄로스), 2002년 알렉스 카브레라(세이부 라이온스) 등이 왕정치의 기록을 깨기 위해 도전했지만 각각 54개(바스), 55개(로즈, 카브레라)에 그쳐 기록 경신에 실패했다.

 

당시 기록 유지를 위해 왕정치가 감독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느냐는 '고의사구 지시 의혹'은 지금도 논란이 진행중이다.

 

 

왕정치가 1973년 9월3일 요미우리 홈경기장인 도쿄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전 3회말 당시 세계 최고기록이던 통산 756호 홈런을 때린 후 두 손을 번쩍 들고 1루를 향하고 있다.

1985년 압도적인 타력으로 21년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한신. 간판타자 랜디 바스는 이 해에 홈런, 타격, 타점 3관왕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팬들의 관심은 그 때까지 54개의 홈런을 때린 바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여부에 쏠렸다. 시즌 막판 한신은 숙적 요미우리와 2연전을 남겨놓고 있었다. 요미우리의 마운드를 지킨 것은 에이스 에가와 스구루(江川卓)였다. 에가와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바스는 에가와와의 승부에서 3타석에 들어와 2타수 1안타, 볼넷 하나를 기록했다. 5점을 실점한 에가와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이어 들어온 하시모토 게이지는 4번째 타석 때 바스를 고의 볼넷으로 내보냈다. 이어 벌어진 2번째 경기에서는 3타석 모두 고의 사구였다. 결국 바스는 기록 경신에 실패했다.

 

당시 언론들은 고의사구에 대해 그다지 크게 다루지 않았다. 곧바로 일본시리즈가 이어졌기 때문에 당시 승부보다는 일본시리즈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본 대다수 야구팬들은 왕감독이 뭔가 압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요미우리 구단의 이면을 다룬 책 <거인군 터부 사건사>(다카라지마샤, 2006년)를 보면 당시 요미우리 담당기자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압력이요? 담당기자라면 알고 있겠죠." 에가와(당시 선발투수)는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왕 감독이 직접 지시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호리우치(투수코치)와 요시다(배터리코치)는 노코멘트였다.

그러나 훗날 요미우리에서 방출된 한 외국인 선수는 '당시 자이언츠의 투수진은 바스에게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공 1개 당 1000달러의 벌금을 물린다는 말을 코치로부터 전달받았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외국인 선수는 '왕 감독이 바스를 시기했던 것이 틀림없었다'는 상황증거를 담당기자에게 밝혔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은 모두 요미우리의 '1급 비밀'이었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시절 왕정치(왼쪽)와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 두 사람은 이른바 ON타선을 구축하며 1960~7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또다시 의혹은 불거져 나온다. 2001년 나온 이른바 '로즈 고의사구 사건'이다. 긴테쓰 버펄로스의 터피 로즈는 당시 55개의 홈런을 때려 왕정치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룬다. 남은 경기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3연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다이에를 이끌고 있던 사령탑이 왕정치였다. 1번타자로 나선 로즈는 전 타석 고의사구. 경기 후 취재진이 몰려들어 '왕 감독이 고의사구를 지시했느냐'는 질문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코치는 발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감독은 기록으로 남은 사람이다. 그것을 지켜줘야 한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감독은 '승부하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감독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

 

이듬해 세이부의 알렉스 카브레라의 경우에도 비슷한 소동이 일어났다. 2002년 10월5일 이 때도 세이부와 격돌한 것은 다이에. 세이부의투수진은 56호 홈런 달성여부가 걸린 경기에서 정면승부를 피했다..

 

왕정치의 시즌 55호 홈런을 빗대 '55호 체제'라고 꼬집는 표현이 있다. 일본의 전후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55년 체제'를 패러디한 것이다. 55년 체제는 40여년이 지난 2009년 붕괴했지만 '55호 체제'는 아직까지 '불가침'의 성역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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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홍민

고시엔 야구대회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는 마쓰자카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는 일본 야구사의 한 획을 그은 투수로 평가받는다. '헤이세이(平成)의 괴물'이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철완이 뿜어내는 강속구는 무시무시했다. 불같은 강속구로 타자를 굴복시키는 위압감과 다채롭고 섬세한 변화구, 바이오메카니즘 원리에 따른 화려한 투구폼, 그리고 어떤 타자와 맞서도 밀리지 않는 배짱과 여유는 보통 투수와는 다른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와 비견할 투수는 100년이 넘는 일본 야구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일본 야구평론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 한 경기 250개 '괴력의 투구'

 

마쓰자카의 이름을 선열하게 각인시킨 무대는 1998년 여름에 열린 제80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 대회였다. 특히 대회 8강전이었던 요코하마고-PL학원고의 경기는 일본 고교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 8월20일 오전 8시30분 고시엔구장에서 첫 경기로 열린 양교의 격돌은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무려 4만3000명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경기는 일진일퇴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PL학원이 먼저 점수를 뽑으면 요코하마고가 쫓아가는 형국이 되풀이됐다.

 

2회말 희생플라이와 2루타, 적시타 등을 묶어 PL학원이 3점을 선취하자 4회초 요코하마고는 포수 고야마 요시오(小山良男)의 2점 홈런으로 반격했다.

그러나 이어진 4회말 공격에서 PL학원은 다시 1점을 달아났다. 요코하마고는 다시 5회초 마쓰모토 쓰토무(松本勉)의 2타점 2루타로 4-4 동점을 만들었다. 7회말과 8회초에 각각 1점씩 주고받은 경기는 9회말 5-5 상황에서 연장으로 넘어갔다. 선발투수로 등판한 마쓰자카의 투구수는 이미 139개를 찍고 있었다.

 

11회초 요코하마고가 1점을 앞서가자 11회말 PL학원이 쫓아왔고, 16회에도 양팀은 각각 1점씩 뽑아내 숨막히는 승부를 이어갔다. 희비가 갈린 것은 17회였다. 2사후 투수의 악송구를 틈타 출루한 주자를 1루에 놓고 도키와 료타(常盤良太)가 상대팀 에이스 가미시케 사토시(上重聰)의 초구를 강타, 우측 스탠드를 꽂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당시 덕아웃 앞에서 연습투구를 하던 마쓰자카는 환희의 만세를 불렀고 이 장면은 고스란히 TV 화면을 통해 일본 전역에 전해졌다.(지금도 유명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17회말 PL학원의 공격이 남아 있었지만 더이상 쫓아갈 힘이 없었다. 3자 범퇴. 마지막 51번째 아웃을 삼진으로 잡아낸 마쓰자카의 투구수는 딱 250개였다. 3시간37분에 걸친 혈투가 끝났을 때 시계는 12시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기종료 후 패배한 PL학원측 덕아웃에는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반면 요코하마고 선수들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돼 있었다. 

 

마쓰자카의 드라마는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튿날 벌어진 4강전에서도 요코하마고는 다시한번 명승부를 펼친다. 4강전 상대는 메이토쿠기주쿠(明德義塾). 요코하마고는 전날 250구를 뿌린 마쓰자카 대신 2년생 투수 2명을 잇따라 내보냈지만 메이토쿠 강타선에 압도당하며 8회초까지 0-6으로 끌려갔다. 누가봐도 요코하마고의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실제 요코하마고의 와타나베 모토노리(渡邊元智) 감독은 그라운드의 나인을 불러놓고 "남은 2이닝동안 경기를 뒤집기는 어렵다. 이제부터는 실컷 고시엔을 즐겨라"라고 말했다.

 

그 때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요코하마고는 8회말 메이토쿠의 선발 데라모토 시로(寺本四郞), 구원투수 다카하시 가즈마사(高橋一正) 로부터 4점을 만회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9회초.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바로 마쓰자카였다. 본인이 전날 기자회견에서 "내일은 던질 수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터였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에이스로서 나서 9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탄력을 받은 요코하마고의 타선은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마침내 터지기 시작했다. 고토 다케토시(後藤武敏)의 2타점 적시타에 이어, 2사 만루에서 시바 다케시(紫武志)의 끝내기 안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6점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경기를 내준 메이토쿠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엎드려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마쓰자카가 1998년 8월 80회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대회) 결승전에서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뒤 환호하고 있다.

교토세이쇼(京都成章)와의 결승전은 마쓰자카가 왜 위대한 선수인지를 보여준 한판이었다. 마쓰자카는 초반부터 차곡차곡 3자 범퇴행진을 벌이며 교토세이쇼의 타선을 무력화시키더니 결국 노히트노런(무안타무실점)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요코하마의 3-0 승리. 고시엔 결승전 노히트노런은 1939년 가이소중(海草中-현재 고요<向陽>고교:와카야마현 소재)의 시마 세이이치(嶋淸一)가 달성한 이후 59년만의 일로 사상 두번째였다. 요코하마고 역시 사상 5번째로 봄철 여름철 고교야구선수권을 제패하는 야구 명문고로 이름을 올렸다.

 

 

 

■ "일본 고교야구를 평정하고 싶다"

 

고교 졸업 후 마쓰자카는 3개 구단(닛폰햄 파이터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세이부 라이온스)의 경합 끝에 세이부의 지명을 받아 1999년 프로에 데뷔했다. 첫해 16승5패, 방어율 2.60의 발군의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을 따냈고, 이어 3년 연속 퍼시픽리그 최다승 투수에 올랐다. 2001년에는 일본 최고투수에게 주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108승60패를 올린 그는 2007년 화려하게 메이저리그 무대에 진출해 지난해까지 보스턴에서 6시즌을 뛰며 50승37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의 마쓰자카.

사실 마쓰자카가 주목을 받은 것은 중학리그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마쓰자카는 중학교 시절 도쿄 에도가와구의 '에도가와미나미(江戶川南) 시니어'에 소속돼 2학년 때는 전국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고교 야구계로부터 주목을 받기시작해 30여개 고등학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에도가와미나미시니어의 감독은 도쿄 데이쿄(帝京)고교와 인연이 깊어, 대다수 사람들이 마쓰자카의 데이쿄 진학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마쓰자카가 선택한 것은 도쿄에 인접한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 고교였다.

 

그가 요코하마를 택한 것은 3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 중학교 시절 공식전에서 마쓰자카가 3번을 패했는데, 그 중 2패가 고야마 요시오, 도키와 료타, 고이케 마사아키(小池正晃)가 속해있던 '나카모토마이시니어'팀이었다. 이들 세 선수가 요코하마에 진학한다는 사실을 접한 마쓰자카는 "이 친구들과 같이 뛴다면 고시엔 제패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운동환경 때문이었다. 데이쿄는 야구뿐 아니라 축구에서도 전국 굴지의 명문고이다. 때문에 운동장은 야구부와 축구부가 같이 쓰도록 돼 있었다. 반면 요코하마고 야구부는 야간조명시설을 갖추고 좌우 펜스길이 95m의 전용야구장에서 훈련에 전념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마지막 이유는 투수로서 마쓰자카를 필요로했던 학교가 요코하마고교 한 곳 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쓰자카를 원했던 다른 학교 대부분은 그의 공격센스를 높이 평가해 타자로서 입교를 권유했던 것이다.

 

■마쓰자카 세대

 

마쓰자카의 명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그와 같은 세대에 출생한 선수들 가운데는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계를 주름잡는 수준급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그런 선수들 가운데서도 군계일학과 같은 활약을 펼쳤다는 점에서다. 일본에서는 '마쓰자카 세대'라며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을 쓴다. 1980년 4월2일~1981년 4월1일 태어난(일본은 각급 학교의 학기가 4월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동 세대를 분류할 때 4월을 기준으로 한다) 선수들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한신 타이거스의 수호신 후지카와 규지(藤本球兒), 히로시마 카프의 내야수 히가시데 아키히로(東出輝裕),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좌완 에이스 스기우치 도시야(衫內俊哉), 요미우리의 거포 무라타 슈이치(村田修一), 요코하마의 호타 준족 모리모토 히초리(森本稀哲) 등등 이루 손꼽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마쓰자카 세대로 자신이 분류되는 데 격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 한신의 구보타 도모유키(久保田智之) 같은 선수는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우리를 마쓰자카 세대에) 엮지 말라"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무라타 슈이치는 본인이 마운드에서 내려온 것이 마쓰자카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속한 히가시후쿠오카(東福岡) 고교가 98년 봄철 전국고교야구선수권 3회전에서 요코하마와 맞붙어 석점차로 패한 적이 있었다. 경기 후 무라타는 "점수차는 3점이었지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경기에서 마쓰자카의 피칭을 보고 투수로서 한계를 느껴 야수로 전향했다"고 밝혔다. 현재 무라타는 요코하마의 중심타자를 거쳐 요미우리에서 활약하고 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일본 대표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당시 나온 마쓰자카 선수카드.

지난 2월11일 MLB.com을 비롯한 외신들은 일제히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의 이적 소식을 전했다. 지난해까지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던 마쓰자카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계약을 맺었다는 뉴스였다. 조건은 1년간 150만달러. 2006년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메이저리그로 갈 당시 보스턴이 마쓰자카를 데려오기 위해 뿌린 1억311만1111달러(입찰금액+연봉)이었지만 약 7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일본 야구계를 호령했던 마쓰자카였지만 그 역시 세월의 무게엔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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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홍민

 

통칭 '고시엔(甲子園) 구장'으로 불리는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 구장(사진)은 일본 야구의 성지다.

 

마쓰자카 다이스케, 마쓰이 히데키, 이치로 등 일본 야구의 웬만한 스타들은 이 그라운드의 흙을 다 밟아봤다. 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서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가 바로 고시엔 구장이다. 고시엔 구장을 상징하는 풍경이 있다. 해마다 열리는 고교야구선수권 대회가 끝나면 패자팀 선수들은 덕아웃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리며 고시엔의 흙을 주머니에 담아 가져간다. 4200여개의 고교 야구팀 가운데 지역 예선을 통과한 49개팀만이 밟아볼 수 있는 이 구장의 까만 흙은 그들의 가보로 모셔진다. 단순한 야구장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흔히 고시엔 구장이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알지만 행정구역상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다

1924년 8월1일 문을 열었다. 벌써 90년 가까이 지났다. 구장 건설 계획이 마련된 1923년 당시에는 에다가와(枝川) 구장으로 명명됐지만, 구장이 완공된 해가 '갑자(甲子)년'이란 이유(10천간12간지의 맨 처음인데다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길한 해라는 점을 고려)에서 고시엔으로 이름을 바꿨다.

 

고시엔 구장은 일본에서 가장 큰 야구장이다. 1층으로 지어진 경기장임에도 4만7757석의 좌석을 갖췄다. 잠실야구장이 3만여명 들어가는 점과 비교하면 1.5배에 달하는 규모다. 좌석이 5만석에 육박하는 것은 외야석의 규모가 전체 수용관중석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다른 팀 본거지 구장의 외야석의 비율이 20~30%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좌측 외야석(9448석)과 우측외야석(9595석)만 합쳐도 2만석에 가깝다.

 

또 좌우 내야석 가운데 외야석쪽으로 붙어 있는 좌석을 '알프스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8월 고교야구선수권대

회 때 흰색 교복차림의 응원단이 뒤덮은 스탠드가 마치 눈이 온 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여름이면 알프스 스탠드는 모교를 응원하는 하얀색 물결로 가득찬다.



고시엔구장의 흙을 담아가는 선수들, 출처:위키피디아

뭐니뭐니해도 고시엔의 상징은 내야 그라운드에 깔린 검은 흙(黑土)이다. 가고시마, 오카야마, 돗토리, 오이타현 등에서 나는 흑토와 중국 푸젠성의 흰모래를 섞은 것이다. 계절에 따라 흑토와 흰모래의 비율을 달리한다. 고시엔 구장의 흙이 다른 구장보다 짙은 흑색으로 깐 데는 관중에 대한 배려가 숨어 있다. 경기 중 날아가는 볼의 궤적을 관중들에게 좀 더 잘 보일 수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기에서 진 팀의 학생들이 고시엔의 흙을 담아가지고 가는 전통이 언제부터 유래되고 정착됐는지 확실치는 않다. 1937년 23회 대회 결승전에서 패퇴한 구마모토공고의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 타격의 신으로 불리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1965~1973년 일본시리즈 9연패를 할 당시 감독) 선수가 유니폼 호주머니에 흙을 담아가 모교 운동장에 뿌렸다는 설 등이 있다.

 

고시엔구장의 또다른 상징은 경기장 정면 외벽을 푸르게 장식했던 담쟁이덩쿨이다.

2000년대 들어 대대적인 구장 리모델링을 하면서 담쟁이덩쿨은 뽑혀졌지만,이 덩쿨은 전국 고교야구연맹에 가입한 4000여개 학교로 나눠졌다. 구장측은 2008년 6월 이 중 생육상태가 양호한 233개교의 담쟁이 덩쿨을 모아 '담쟁이 귀향 행사'를 열었다. 고향에 돌아온 담쟁이덩쿨은 앞으로 10여년 뒤면 구장 외벽을 다시 새파랗게 뒤덮을 예정이다. 구장의 또하나 특색은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게 외야가 천연잔디로 포장돼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프로야구팀 홈 구장에 인조잔디가 깔려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고시엔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대회는 역시 8월에 벌어지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아사히신문 주최)다.

3월에 전국선발고교야구선수권대회(마이니치신문 주최)가 있지만 광역 예선을 거치는데다 초청학교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인기나 권위면에서 8월 대회에 못미친다. 고시엔이 고교야구대회의 '브랜드'화 되면서 고시엔은 고교생들이 참가하는 대회의 대명사가 됐다. 예를 들면 '합창 고시엔대회' '요리 고시엔대회' 등이란 이름으로 고교생들이 참가하는 수많은 경연들이 일본에서 펼쳐진다. 또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에서는 보통 면적을 비교할 때 '고시엔구장 ○개분'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착돼 있다.(고시엔 그라운드 면적은 1만3000㎡)

 

고시엔 구장은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한신의 경기가 열릴 때면 수용능력 4만7000여석의 관중석은 거의 꽉 들어찬다. 특히 교신센(巨神戰)으로 불리는 숙적 요미우리와의 경기는 한일전을 방불케하는 열기로 구장을 달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신 타이거즈는 고시엔에서 일본시리즈 제패해 환희의 헹가레를 쳐본 일이 없다. 한신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은 1985년 단 한 차례였지만 당시 승부를 결정지은 장소는 원정지였던 세이부 라이온스의 홈구장이었던 탓이다.

 

 

고시엔 전철역.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점은 고시엔 구장에는 주차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갔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구단측은 광고 등을 통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방송을 수시로 알려준다. 구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고시엔 전철역이 있다. 여러 편의 노선버스도 구장을 운행한다. 8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때 응원단을 싣고 오는 버스 등은 주변 마트나 사설 주차장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물론 유료다)

 

현역 프로야구 선수들도 고시엔에서 경기하는 것에 대해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1992년 입단해 올해로 22년째 요코하마 DeNA에서 활약중인 에이스 미우라 다이스케(三浦大輔)는 한 TV프로그램에서 후배 선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4만여 관중 앞에서 선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러나 고시엔 마운드에 서서 공을 뿌린다는 것은 야구 선수로서는 커다란 영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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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홍민

2002년 한일월드컵 취재를 위해 일본에 출장을 갔다. 기사 마감을 하고 늦은 저녁 잡아탄 택시에서는 프로야구 중계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월드컵 기간인데 축구보다 야구에 관심이 많네요"라고 운전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에게서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니폰와 야큐노 쿠니데스(일본은 야구의 나라입니다)". 축구는 젊은 세대나 좋아하지 자기들은 아니라면서. 신문은 물론 방송들까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통 축구얘기로 도배를 하고 있었지만 축구는 그에게 딴 나라 얘기였다. 그러면서 운전사는 "축구의 인기가 야구만큼 오르려면 적어도 30년은 더 있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는 일본의 국기(國技)다. 스모(일본 전통씨름)나 배구의 인기도 높지만 야구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단순한 스포츠 이상이다. 3월 하순에 시즌을 시작하는 프로야구, 3월과 8월 열리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열도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특히 10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고시엔(甲子園) 야구대회'는 열도를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한다. 이 대회는 전국 4200여개 고등학교가 참가해 지역 예선을 거쳐 약 50개 팀이 우승컵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벌어지는 열전 전 경기를 NHK 방송에서 생중계한다.

 

2011년 3월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벌어진 오릭스 버펄로스와 닛폰햄 파이터스의 시범경기. 시범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구장에는 1만명이 넘는 관중이 들어와 경기를 지켜봤다.

 

 

뿐만 아니다. 매년 2월 시작하는 각 프로야구단의 전지훈련(주로 오키나와나 큐슈 지방에서 한다)에는 전국 각지에서 팬들이 몰려온다. 2월1일은 그래서 '야구의 설날(野球元旦)'이라고 부른다. 가을에 열리는 프로야구단 신인 선수 드래프트 추첨은 TV로 생중계할 정도다. 이와 별도로 자국 선수들이 활약하는 메이저리그도 TV를 통해 거의 매일 시청할 수 있다. 비시즌 기간 동안에도 갖가지 시시콜콜한 야구 관련 소식이 각 미디어의 주요 기사리스트에 오른다.

 

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선수는 당연히 어린이들이 꿈꾸는 선망의 대상이다.

해마다 조사하는 장래희망 순위에서 프로야구 선수는 항상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웬만한 학교나 동네에는 야구장 시설이 들어서 있다. 주말이면 야구유니폼을 차려 입고 훈련장을 찾거나 저녁 때 공터나, 주차장 등지에서 그물을 쳐놓고 티배팅을 하는 어린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야구에 열광하는 것은 개인보다는 팀, 구성원을 중시하는 의식 및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원 포 올, 올 포 원(One for all, all for one)'이란 캐치프레이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은 모두를 위해 존재하고, 팀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집합체이다. 다시말해 야구가 바로 이런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스포츠가 야구다. 예컨대 고교 대회 후 인터뷰에서 선수들은 '연결'을 뜻하는 '쓰나가리(がり)란 표현을 자주 쓴다. "내가 살아나가 뒤의 선수에게 연결해줌으로써 팀을 위한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일본인들이 야구에 더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미국의 스포츠저널리스트 로버트 화이팅의 저서 <국화와 배트>에서는 일본 야구의 본질을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의 야구는 일견 미국 야구와 같아보이지만 실은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일본인은 단체 사고와 협조성을 중시하고 모든 일에 노력을 요구하며, 연장자를 존경하고 체면을 중시한다. 그들의 이러한 생활관이 이 스포츠(야구)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독특한 성질을 갖게됐다."

 

일본인에게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하나의 문화, 아니 그 이상의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일본에서 4년간 살면서 야구에 푹 빠졌다. 작렬하는 여름 태양 아래서 벌어지는 고시엔 야구 중계를 지켜봤고, 주말이면 도쿄 인근의 구장들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관람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면 각 구단의 선수 프로필을 모아놓은 선수 명감(名鑑) 사모았다. 각종 야구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야구에 대한 열정과 환희, 무엇보다도 6개나 되는 돔구장(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도코로자와, 삿포로)에 부러움을 갖기도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그동안 접했던 일본 야구에 관한 정보와 화제, 뒷얘기 등을 풀어놓을 예정이다. 부담없이 가볍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아울러 잘못된 정보나 오류, 오탈자 등을 발견할 경우 지적해주시면 좋겠다. 미흡한 점이나 비판도 기탄없이 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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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홍민